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로
한가지 목적과 3가지 이야기
발단
저번 포스트에 Pwaay님께서 위와 같은 댓글을 남겨주셔서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해보려고 한다.
서론
현재 Web2의 인프라의 비용 효율성을 블록체인이 넘을 수가 없는데 블록체인은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닐까?
일단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이 블록체인의 미래로 갈 수 밖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블록체인을 좋아하고, 블록체인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블록체인의 기술이 사회 전반에서 적용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그 누구도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주장할 수 있고, 밈을 퍼뜨릴 수 있다. 이전 글에서 얘기하였듯이, 밈의 파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냐에 달려있다. 결국 설득의 게임이다.
생각 심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보면, 생각을 심는다는 개념이 등장한다.
설득 역시 상대에게 내 생각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만약 어떤 상대와의 논의에서 바로 내 생각을 상대에게 설득시킬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려야 할 것은 생각의 씨앗을 상대방의 머릿속에 몰래 심어두는 것이다. 그 씨앗은 조금씩 자라서, 어떤 트리거를 통하여 언젠간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발화할 것이다.
전략적으로 다가가기
상대방에 대하여 잘 알수록, 우리는 더 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여기서 전략적이란, 그 어떠한 것도 될 수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해줄 수도 있고, 이성보다 감성을 자극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한가지 프레임이 아니라 여러가지 프레임을 가지고 자유롭게, 유연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블록체인만 봐도, 어떤 점을 강조할지, 어떤 내러티브를 짤지는 무궁무진하다. 만약 100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그 중에서 99개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지만, 단 한개의 씨앗은 그 사람의 무의식에 자리잡을 수도 있다.
개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위 질문에 대하여 총 3가지의 프레임, 내러티브를 준비하였다. 각 프레임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 3 프레임이 전부 당신에게 매력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만 당신에게 공명할 수 있다면, 충분한 성공이며, 당장에 그 어떤 것에도 공감할 수 없더라도, 만약 이 프레임의 씨앗이 당신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아서 어떤 계기를 통하여 발화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성공일 것이다.
1. 플랫폼은 정당성이 필요하다.
플랫폼의 영향력
더 이상 테크 플랫폼들은 단순한 앱의 정도를 넘어섰다. 과거 페이스북의 편향된 알고리즘은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불안감을 높였고, 현재 유튜브는 사람들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여가를 보내는 곳으로써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떤 것을 추천하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뭘 보고, 소비할지를 정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불안감은 단순히 페이스북 사용자들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였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형성된 유행은 단순히 유튜브 사용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페이스북과 유튜브는 그 플랫폼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을 넘어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준다.
사회적 정당성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와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들은 사회적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이때 블록체인이 사용될 수 있다. 블록체인의 투명성, 수정-불가능과 같은 가치들은 이러한 플랫폼들에게 사회적 정당성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다. 물론, 블록체인을 사용함으로써 기존 인프라의 효율성을 포기해야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에 그들은 사회적 정당성을 대중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2. 유저들이 원한다면
유저가 선택한 플랫폼이 살아남는다.
유저와 플랫폼은 닭과 달걀 같은 관계이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 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점에서 유저 없이는 플랫폼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유저들이 플랫폼 A와 B 중에서 A를 고르면, A가 살아남는 것이다. B가 A보다 기술적으로 월등하게 우월하고, …. 전부 의미가 없다. 결국, 유저들이 선택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사장된다.
필요시 감수해야할 것
결국 비용 효율성은 하나의 인자일 뿐이다. Web3가 제공하는 가치들이 유저들에게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비용 효율성은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유저들이 web3에서 제공하는 가치에 점점 더 공감할수록, 기존 플랫폼들 중 민감한 플랫폼들은 변화를 꾀할 것이고, 나머지 플랫폼들 역시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밀릴 것이고, 결국 원하지 않더라도 변화해야할 것이다.
유저들은 어떤 가치에 공감할 수 있을까
Web3가 유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치들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유저들이 플랫폼에 참여함으로써 발생하는 가치의 일부를 수익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제적 인센티브는 가장 직관적이다. 가장 강력하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직관적이기 때문에, 유저들은 당장 손익 계산에서 이득이 있으면 일부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3. 이상적이다는 것
분명 블록체인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적이다는 것이 과연 나쁘거나, 단순히 나이브하다고 볼 수 있을까?
혁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설명하였는데, 그걸 듣고 당장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그 아이디어는 절대 세상을 혁신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꾼다, 혹은 혁신한다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것으로써 절대 당장 말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블록체인은 혁신의 ‘가능성’이 있는 기술이고, 이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블록체인을 공부하는 이유
또한, 어떤 주장이 이상적이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를 이상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아예 논리적 근거가 없는 이상적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만, 블록체인은 다르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은 이미 현실에서 Proof of Concept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는 단계이다.
만약, 어떤 기술이 충분히 이상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그 기술을 연구하며, 도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사회를 좋게 바꾸지도 못할 기술을 위하여 왜 노력해야 하는가? 블록체인은 세상을 새로 만드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몇천년동안 써내래져간 역사를 블록체인은 전부 재발명(reinvent)하려 한다. 이런 목표를 가졌는데, 어떻게 이상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블록체인은 이상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블록체인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이렇게 나는 위 질문에 대한 답을 3가지 버전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해보았다. 첫번째 프레임의 경우에는 플랫폼들이 가지는 사회적 책임, 정당성을 통하여 블록체인의 필요성을 어필하였고, 두번째 프레임은 결국 유저들이 선택하는 플랫폼이 살아남고, 거기서 Web3가 엣지를 가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마지막 프레임은 이상적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상적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결국에는 프레임의 싸움이다. 어떤 프레임을 짜고, 그 것을 씨앗으로서 심을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절대로 한가지의 ‘옳은’ 프레임은 있을 수 없다. 모든 프레임은 공격당할 수 있고, 절대 논리적으로 완벽한 프레임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전 ‘설득의 게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그것은 절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설득시킬 수 있느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